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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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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임진왜란의 일부
Image
날짜1597년 8월 27일 ~ 1598년 12월 16일
장소
결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일본
지휘관
조선

일본
병력
조선군:175,000여 명
명군:100,000여 명[1]
약 141,000여 명

정유재란(丁酉再亂)은 1597년 8월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년 12월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일본에서는 당시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의 연호를 따서 게이초의 역(慶長 (けいちょう) (えき) 게이초노에키[*])이라고 한다.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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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라도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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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고 일본 육군은 임진년 침공과 다르게 보급로를 탄탄히 하려고 전라도를 점령한 후 한양(서울)을 공격하기로 한다.

당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칠천량 해전 대패로 말미암아 남해안 대부분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9월 29일(음력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또한,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고자 조선인들의 를 베어 전리품으로 일본에 보냈고(→귀무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구 잡아 서양에서 온 노예상에게 매각했다.

직산 전투와 명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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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전주를 함락한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稷山)까지 진격했다. 후에 직산에서 명나라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시키자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한 일본 육군은 직산을 끝으로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울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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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과 일본 육군의 공수가 바뀐다. 1597년 12월 말에서 1598년 1월 초에 걸쳐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울산왜성(蔚山倭城)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2][3][4] 일본 육군은 군량이 극심하게 부족한 상태에서 고군분투하였다.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연합군은 서로군(西路軍), 중로군(中路軍), 동로군(東路軍)을 편성하고 수군이 이를 받치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는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였으나 왜교성 전투(倭橋城戰鬪),[5] 제2차 울산성 전투,[6][7] 사천 전투에서 패하였다.[8][9][10][11][12]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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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교성 전투노량 해전을 그린 병풍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중에 죽자 왜군은 결국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노량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쫓아 함대를 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왜군은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본국으로 철수에는 성공하여 임진왜란~정유재란은 종전하였다. 여기서 철수에 성공했다는 뜻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위시한 주요 지휘관이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의미이고 일반 병졸들 중에는 철수에 실패한 인원도 많았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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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urnbull, Stephen. 2002, pp. 217.
  2.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0日(丙申) 3번째기사 접반사 윤형, 충청 절도사 이시언이 적과의 전투상황을 보고하다
  3.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6日(壬寅) 2번째기사 이시언•성윤문이 적과 한 전투 상황과 후퇴 사실을 알리다
  4.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6日(壬寅) 3번째 기사 접반사 이덕열이 후퇴중 입은 피해와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하다
  5.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6번째 기사 우의정 이덕형이 명군의 패전에 관한 일로 치계하다
  6.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2日(甲寅) 3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이 경주로 퇴진하려 한다는 치계를 올리다
  7.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0日(壬戌) 7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의 패전에 대한 치계를 올리다
  8.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8日(庚申) 7번째 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
  9.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0日(壬戌) 6번째 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가 명군의 퇴각을 다룬 치계를 올리다
  10.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6日(戊辰) 3번째 기사 동 제독이 전투에 관한 게첩을 올리다
  11.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7日(己巳) 1번째기사 감찰 어사 진효의 일본군과 한 전투에 관한 제본
  12.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7번째기사 삼로의 군사가 패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