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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분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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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ean Metzinger, 1911-12, La Femme au Cheval - The Rider.jpg
장 메챙제, 1911~1912년경, 《말을 탄 여인(영어판)》, 캔버스에 유채, 162 x 130 cm, 스테텐스 미술관, 덴마크 국립 미술관. 기욤 아폴리네르의 1913년 저서 《입체주의에 대하여》에 수록됨. 1912년 앙데팡당전에 전시. 소장 이력: 자크 나이랄, 닐스 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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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글레즈, 1911년, 《사냥(영어판)》, 캔버스에 유채, 123.2 x 99 cm. 1911년 10월 10일 자 《랭트랑시장》, 기욤 아폴리네르의 1913년 저서 《입체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1911년 10월 파리에서 발행된 《오트롱톤 살롱, 유럽과 아메리카 리뷰》에 수록됨. 1911년 살롱 도톤, 1912년 모스크바의 《다이아몬드 잭(발레 드 카로)》전, 1912년 파리 갈르리 드 라 보에티의 《황금분할파 살롱》전에 전시됨

황금분할파(프랑스어: Section d'Or)는 퓌토 그룹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입체주의 및 오르피즘과 관련된 화가, 조각가, 시인 및 비평가들의 집단이다. 파리 교외를 거점으로 활동한 이 그룹은 퓌토에 있는 뒤샹 형제의 집과 쿠르브부아에 있는 알베르 글레즈의 작업실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1] 1911년부터 1914년경까지 활동한 이 그룹의 회원들은 1911년 봄 앙데팡당전에서 논란이 된 전시를 계기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알베르 글레즈, 장 메챙제, 로베르 들로네, 앙리 르 포코니에, 페르낭 레제, (기욤 아폴리네르의 요청에 따라 참여한) 마리 로랑생의 작품이 전시된 이 전시회는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를 통해 입체파는 처음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12년 10월에 열린 황금분할파 살롱(Salon de la Section d'Or)[2]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입체주의 작품을 전시한 가장 크고 중요한 공공 전시회로, 더 폭넓은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미술상 레옹스 로젠버그의 지원을 받아 입체주의는 다시 파리 예술계의 중심 무대로 복귀했다. 퓌토 그룹의 여러 구성원들은 입체주의 태동 이후 진행된 변화와 쇄신의 전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목표로 1920년과 1925년에 두 차례 더 대규모 '황금분할파'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그룹은 조르주 쇠라와 관련된 수학적 조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동시에 파리 몽마르트르 지구에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병행하여 발전시킨 더 좁은 의미의 입체주의 스타일과 스스로를 구별하기 위해 '황금분할'(Section d'Or)라는 이름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이름은 입체주의가 고립된 예술 형태가 아니라 위대한 전통의 연속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황금비, 즉 황금분할은 최소 2,400년 동안 다양한 분야의 서구 지식인들을 매료시켜 온 개념이었다.[3][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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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토 그룹(노르망디 현대회화협회의 분파)은 1912년 10월 파리의 갈르리 라 보에티에서 '황금분할파 살롱'이라는 이름으로 첫 전시회를 개최했다. 알베르 글레즈와 장 메챙제는 이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입체주의를 옹호하는 중요한 저술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새로운 예술 운동에 관한 최초의 이론적 에세이인 《입체주의에 대하여》였다(1912년 외젠 피기에 발행, 1913년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5][6][7][8]

1911년 살롱 전시 이후, 르 포코니에, 메챙제, 글레즈, 레제, 들로네가 결성한 그룹은 다른 여러 예술가들로 확장되었다. 1911년 앙데팡당전 이전에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알렉산드르 아키펭코, 조제프 차키, 로제 드 라 프레스네, 후안 그리스, 장 마르샹이 퓌토와 쿠르브부아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프란티세크 쿠프카는 자크 비용과 같은 단지 내에서 수년간 거주했다.[9] 프란시스 피카비아는 최근 친분을 쌓은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의 소개로 이 서클에 합류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메칭거와 자크 비용, 마르셀 뒤샹, 그리고 뒤샹-비용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던 뒤샹 형제와의 인연이었다. 개막 연설은 아폴리네르가 맡았다. 1912년 10월 '레 자르티스트 드 파시(Les Artistes de Passy)' 결성에 이들 중 많은 예술가가 참여한 것은 파리 파시 지구를 또 하나의 예술 중심지로 만들려는 시도였으며, 이는 황금분할파 전시회에서 정점에 달할 공동체 활동에 대한 강조가 더욱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였다.[10]

용어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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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uchamp - Nude Descending a Staircase.jpg
마르셀 뒤샹, 1912년,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넘버 2》(그림 보기), 캔버스에 유채, 147 x 89.2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1912년 황금분할파 살롱, 1913년 아모리 쇼에 전시

황금분할파(Section d'Or)라는 개념은 글레즈, 메챙제, 자크 비용 등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룹의 명칭은 자크 비용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론》에 대한 조제팽 펠라당의 1910년 번역본을 읽은 후 제안한 것이다. 펠라당은 황금비와 기타 유사한 기하학적 구성에 큰 신비주의적 의미를 부여했다. 자크 비용에게 이는 자연에서 발생하는 패턴과 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질서와 수학적 비례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상징했다. 장 메챙제와 뒤샹 형제는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장 메챙제, 후안 그리스, 그리고 어쩌면 마르셀 뒤샹까지도 모리스 프랭세와 교류했는데, 그는 입체주의 논의에 있어 심오하고 합리적인 과학적 논거를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는 아마추어 수학자였다.[11] '황금분할파'라는 명칭은 과거 전통과의 연속성과 예술 분야의 현재 트렌드를 나타내는 동시에, 예술의 미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었다.[12]

미술사학자 다니엘 로빈스는 이 용어가 수학적 황금분할을 참조하는 것 외에도, 알베르 글레즈와 크레테유의 아베 출신의 다른 전 회원들이 깊이 관여했던 이전의 '방도 도르(Bandeaux d'Or)' 그룹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13]

1912년 황금분할파 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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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분할파 전시회 특별호, 1년차, 1호, 1912년 10월 9일

1912년 황금분할파 살롱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열린 가장 중요한 입체주의 전시회였다. 전년도에 입체주의자들과 그 동료 다수는 노르망디 현대회화협회의 후원으로 파리 트롱셰 가에 있는 현대미술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이 전시회는 《로토리테》와 《파리 저널》등의 언론으로부터 어느 정도 관심을 받았지만, 작품의 다양성 때문에 야수파와 입체주의자의 전시로 불렸다. 그러나 황금분할파 살롱은 완전히 입체주의적 성격을 띤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200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많은 예술가가 1909년부터 1912년까지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작들을 출품했다는 점은 이 전시회에 큐비즘 회고전과 같은 매력을 더해주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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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글레즈, 1912년, 《수확 탈곡(영어판)》, 캔버스에 유채, 269 x 353 cm, 국립서양미술관, 도쿄

제41 전시실(Salle 41) 입체주의자들이 1911년 앙데팡당전 전시가 불러 일으킨 격렬한 반응에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황금분할파 살롱으로 가능한 한 많은 관심을 끌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막식은 9시부터 자정까지 열렸는데, 이와 같은 시간대에 개막한 것은 1903년 살롱 도톤이 유일했었다. 전시회 이전에 초대장이 널리 배포되었고, 개막 당일(1912년 10월 9일) 밤에는 많은 손님이 입장하지 못해 돌아가야 했다. 아폴리네르, 우르카드, 레날의 강연이 광고되었고, 개막식에 맞춰 잡지 《황금분할파》가 발행되었다. 이 잡지에는 기욤 아폴리네르, 로제 알라르, 르네 블룸, 올리비에 우르카드, 막스 자코브, 모리스 레날, 피에르 르베르디, 앙드레 살몽, 앙드레 바르노 등의 기고문이 실렸다.[10][12]

1912년 전시회가 입체주의의 전개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주도록 기획되었고, 전시를 위해 《입체주의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폭넓은 관객(미술 비평가, 예술 수집가, 미술상, 일반 대중)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전시회의 큰 성공 덕분에 입체주의는 특정 공통 철학이나 목표를 가진 예술적 경향, 장르 또는 스타일, 즉 새로운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인식도기 시작했다.[10]

주요 작품; 1912년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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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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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황금분할파 살롱에 전시된 작품들이 황금비를 어느 정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수학적 조화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황금분할파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들이 구성에 실제로 황금비 자체를 사용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14][15] 크리스토퍼 그린의 분석에 따르면 후안 그리스는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을 구성할 때 황금비를 사용했다.[16][17]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코팅턴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그림들이 제작되던 시기에 쓰였을 《입체주의에 대하여》(Du "Cubisme")가 비유클리드 개념과 리만 가설을 다소 모호하게 언급했다. 린다 헨더슨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언급들은 현대 수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앙리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에서 발췌(실제로는 표절)한 원리들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저자들 자신도 그러한 수학이 자신들의 예술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 '현대 과학'을 상징하는 막연한 은유(제유)로 여기는 것 외에는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17]

캠필드는 황금분할파에서 황금분할을 사용한 것은 시험적인 수준이라고 기술한다.

이 그림들 중 일부는 물론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에 기초했다. 그러나 후안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그곳의 어느 예술가도 기하학적 비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모든 퓌토 그룹 예술가들이 수학에 관심이 있었지만(마르셀 뒤샹, 저자와의 인터뷰, 1961년 4월 4일), 마르셀 뒤샹도 "황금분할파"라는 이름을 제안한 자크 비용도 황금분할이 실제로 그들의 그림에 사용되었다고 믿지 않는다.[18] 그리고 《입체주의에 대하여》에서는 글레즈와 메챙제는 확실성을 얻기 위해 수학에 의존하려는 화가들을 비판하기도 했다.[15]

캠필드는 자신이 분석한 그림 중 어느 것도 "황금분할파" 전시 작품으로 확실하게 식별될 수 없으며, 단지 "양식적 증거"가 그것들을 그 시기로 분류하고 "거의 확실히 전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라고 말한다.[15]

1912년 황금분할파 살롱 카탈로그에 나열된 제목, 날짜 및 이전 전시 이력 등을 바탕으로 많은 그림이 이후 식별되었는데, 예를 들어 《목욕하는 사람들(영어판)》, 《티타임(영어판)》, 《말과 함께 있는 여인(영어판)》, 그리고 그 밖의 글레즈, 메챙제 등의 많은 작품이 있다. 주요 예외는 후안 그리스의 작품으로, 전시 카탈로그에 그가 제출한 작품의 제목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가 미술상 레옹스 로젠버그 사이의 서신이 공개되면서 그리스의 작품 13점이 전시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이 중 대부분은 제목, 날짜, 규격을 통해 식별되었다.[16]

알베르 글레즈는 1912년 황금분할파 살롱에 《목욕하는 사람들(영어판)》(카탈로그 번호 40)을 출품했다. 캔버스의 비율은 황금사각형(1 대 1.618 ± 0.01 비율)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작품은 105 x 171 cm라는 보기 드문 규격을 가지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글레즈는 일반적으로 황금사각형이 아닌 표준 규격의 캔버스 틀을 사용했다.[19]

《입체주의에 대하여》에서는 입체주의 자체가 어떠한 기하학적 이론에 기초한 것이 아니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고전 기하학보다 입체주의자들이 하던 일에 더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우리가 [입체주의] 화가들의 공간을 기하학에 관련짓고자 한다면, 비유클리드 수학자들을 참조해야 할 것이며, 리만의 정리들 중 일부를 어느 정도 깊이있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6]

미술사학자 크리스토퍼 그린에 따르면, 1912년 후안 그리스의 구성은 종종 "모듈화되고 규칙적이었다... 《카페의 남자》나 《시계》와 같은 그해 여름에 제작된 그림들에서 황금분할에 따른 구도적 요구를 쉽게 충족"시켰다. 이 작품들은 "종합적이고 분석적인 것이 시각적으로 융합되었다. 황금분할 그림들에서... "마치 단층선처럼 대상들 위에 격자를 배치했는데, 이 단층선을 경계로 시점이 전환"되었다.[16]

쇠라에 대한 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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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분할파 전시회, 1925년, 갈르리 바방-라스파이유, 파리. 중앙으로 알베르 글레즈의 《출판사 외젠 피기에(영어판)》, 《사냥(영어판)》, 《목욕하는 사람들(영어판)》이 보인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로베르 들로네와 앙드레 로트의 작품들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보인다

일부 저명한 입체주의자들이 창립한 황금분할파 그룹은 사실상 조르주 쇠라에 대한 오마주 성격을 띠고 있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좋아했던 소재인 카페, 카바레, 콘서트 등을 담은 쇠라 작품 속에서 입체주의자들은 기동성 있고 역동적인 구성으로 쉽게 변형될 수 있는 내재적이고 수학적인 조화를 재발견했다.[20] 표현주의적인 단계였던 1908년에서 1911년 사이에 입체주의 발전에 폴 세잔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면, 쇠라의 작품은 더 평평한 기하학적 구조가 제작되던 1911년에서 1914년 사이에 입체주의자와 미래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입체주의자들이 매력을 느낀 것은 쇠라가 절대적인 "개념의 과학적 명료성"을 확립했다는 사실이었다. 입체파 화가들은 쇠라의 작품에 나타난 수학적 조화와 움직임 및 형태의 기하학적 구조 속에서, 자연보다 관념을 우위에 두는 태도(이는 상징주의자들도 이미 인식했다)를 발견했다. 그들의 눈에 쇠라는 "인상주의가 거부했던 지성과 질서를 예술에 복원함으로써 입체주의를 향한 근본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던" 인물이었다.(로버트 허버트, 1968).[20]

조르주 쇠라의 《서커스 사이드쇼》의 기하학적 구조는 황금분할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현대의 통념은 쇠라가 '신성한 비율'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커스 사이드쇼》는 수평으로 4등분, 수직으로 6등분 되어 있다. 4 : 6 비율은 전통적인 캔버스의 규격과 일치한다. 쇠라의 그림/캔버스 규격의 비율은 1 대 1.502, ± 0.002의 비율에 해당하며, 황금비는 1 대 1.618에 해당한다. 다만, 그림의 구성 축은 기본적인 수학적 분할(황금분할에 근사한 단순 비례)과 일치한다.[21]

황금분할파, 1920년,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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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반 되스버그. 황금분할파 전시회 포스터 디자인, 1920년경. 종이에 잉크, 65 × 62.5 cm, 네덜란드 컬렉션 연구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술상 레옹스 로젠버그의 지원을 받아 입체주의가 다시금 예술가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살롱들이 고전주의로의 회귀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알베르 글레즈는 1920년에 페르낭 레제, 알렉산드르 아키펭코, 조르주 브라크, 콘스탄틴 브랑쿠시, 앙리 로랑, 자크 비용, 레몽 뒤샹비용, 루이 마르쿠시, 레오폴 쉬르바주 등의 지지를 받아 황금분할파의 정신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22][23] 글레즈의 조직적인 노력의 목표는 대규모 순회 전시회인 '황금분할파 전시회'라는 형태로 유럽 전역의 입체주의 및 추상 미술 운동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 기획의 의도는 당시 진행되었던 변혁과 쇄신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었다.[24] 그러나 이는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횄다. 신진 작가들은 물론 마르셀 뒤샹이나 피카비아 같은 기성 작가들에게 입체파는 이미 한물간 사조로 여겨졌던 반면, 글레즈는 입체파의 초기 단계만이 탐구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5]

1920년 3월 5일부터 갈르리 라 보에티에서 열린 제2회 황금분할파 전시회에는 이미 다양한 스타일을 포괄하고 있던 입체주의 작품 외에도, 신조형주의, 바우하우스, 구성주의, 미래주의 작품들도 포함되었다.[26] '황금분할파'의 이러한 부활은 입체주의 전반이 다다이즘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27] 이 새로운 논쟁은 알베르 글레즈의 《입체주의와 그것을 이해하는 수단》, 1922년에는 《회화와 그 법칙》의 출판으로 이어졌다.[28][29]

주요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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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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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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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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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Le Salon de la Section d'Or, Octobre 1912, Mediation Centre Pompidou
  2. ↑ Exhibit catalog for Salon de "La Section d'Or", 1912. Walter Pach papers,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3. ↑ Jeunes Peintres ne vous frappez pas !, La Section d’Or: Numéro spécial consacré à l’Exposition de la "Section d’Or", première année, n° 1, 9 octobre 1912, pp. 1-2.
  4. ↑ Jeunes Peintres ne vous frappez pas !, La Section d’Or: Numéro spécial consacré à l’Exposition de la "Section d’Or", première année, n° 1, 9 octobre 1912, pp. 1-7 보관됨 2020-10-30 - 웨이백 머신, Bibliothèque Kandinsky
  5. ↑ Albert Gleizes, Jean Metzinger, Du "Cubisme", Eugène Figuière Editeurs, Collection "Tous les Arts" Paris, 1912 (new edition published in 1947).
  6. 1 2 From Du Cubisme, Paris, 1912, pp. 9-11, 13-14, 17-21, 25-32. In English in Robert L. Herbert, Modern Artists on Art, Englewood Cliffs, 1964, PDF 보관됨 2013-06-02 - 웨이백 머신 Art Humanities Primary Source Reading 46
  7. ↑ Tate, Raymond Duchamp-Villon retrieved February 12, 2010
  8. ↑ Mark Antliff and Patricia Leighten: A Cubism Reader, Documents and Criticism, 1906-1914,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8
  9. ↑ Peter Brooke, Albert Gleizes, Chronology of his life, 1881-1953 보관됨 2013-05-22 - 웨이백 머신, English version of a text which first appeared in C. Briend et al: Le Cubisme en majesté, Albert Gleizes, exhibition catalogue, Musée Picasso, Barcelona; Musée des Beaux-Arts, Lyon, 2001
  10. 1 2 3 4 The History and Chronology of Cubism, p. 5
  11. ↑ Peter Brooke, private communication
  12. 1 2 La Section d'Or, Numéro spécial, 9 Octobre 1912
  13. ↑ Roger Allard, Sur quelques peintre, Les Marches du Sud-Ouest, June 1911, pp. 57-64. In Mark Antliff and Patricia Leighten, A Cubism Reader, Documents and Criticism, 1906-1914,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8, pp. 178-191, 330
  14. ↑ Livio, Mario (2003) [2002]. 《The Golden Ratio: The Story of Phi, the World's Most Astonishing Number》 Fir trade paperback판. 뉴욕: 브로드웨이 북스. ISBN 978-0-7679-0816-0.
  15. 1 2 3 William A. Camfield, Juan Gris and the Golden Section, Art Bulletin, 47, no. 1, March 1965, 128-34. 68
  16. 1 2 3 Christopher Green, Juan Gris, Whitechapel Art Gallery, London, 18 September - 29 November 1992; 슈투트가르트 주립 미술관 18 December 1992-14 February 1993;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6 March - 2 May 1993, Yale University Press, 1992, pp. 37-38, ISBN 0300053746
  17. 1 2 David Cottington, Cubism and Its Histories, Barber Institute's critical perspectives in art history series, Critical Perspectives in Art History,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4, pp. 112, 142, ISBN 0719050049
  18. ↑ Dora Vallier, Jacques Villon, Paris, 1957, pp. 60-62
  19. ↑ List of standard format stretchers in France, French Wikipedia
  20. 1 2 Robert Herbert, Neo-Impressionism, New York: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1968
  21. ↑ Robert L. Herbert, Georges Seurat, 1859-1891,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91, pp. 340-345, archive.org (full text online)
  22. ↑ Daniel Robbins, 1964, Albert Gleizes 1881 - 1953, A Retrospective Exhibition, Published by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New York, in collaboration with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Museum am Ostwall, Dortmund.
  23. ↑ Section d’Or (Golden Section), 1920
  24. ↑ Albert Gleizes, The Epic, From immobile form to mobile form, in Peter Brooke, Texts by Gleizes 보관됨 2020-02-07 - 웨이백 머신
  25. ↑ Daniel Robbins,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MoMA, Albert Gleizes, Grove Art Online, 2009 Oxford University Press
  26. ↑ La Section d'Or, Kubisme.info
  27. ↑ Christopher Green, 1987, Cubism and its Enemies: Modern Movements and Reaction in French Art, 1916-1928. Yale University Press
  28. ↑ Gino Severini, From Cubism to Classicism. Albert Gleizes, Painting and its Laws, Translation, introduction and notes by Peter Brooke, published by Francis Boutle, London, 2001, ISBN 978 1 903427 05 7
  29. ↑ Fondation Gleizes, Chronologie (French) 보관됨 2008-11-12 - 웨이백 머신

더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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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 Section d'or, 1912-1920-1925, Cécile Debray, Françoise Lucbert, Musées de Châteauroux, Musée Fabre, exhibition catalogue, Éditions Cercle d'art, Paris, 2000.
  • Alfred H. Barr, Jr., Cubism and Abstract Art,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36.
  • John Cauman (2001). 《Inheriting Cubism: The Impact of Cubism on American Art, 1909-1936》. New York: Hollis Taggart Galleries. ISBN 978-0-9705723-4-9. 
  • Cooper, Douglas (1970). 《The Cubist Epoch》. London: Phaidon in association with 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ISBN 978-0-87587-041-0. 
  • John Golding, Cubism: A History and an Analysis, 1907-1914, New York: Wittenborn, 1959.
  • 리처드슨, 존. 《피카소의 삶, 입체주의 반군 1907-1916》. 뉴욕: 앨프리드 A. 노프, 1991. ISBN 978-0-307-26665-1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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